덩치 컸던 ‘평범한 여중생’, 장미란이 진정한 영웅인 이유

장미란의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다.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2010년 교통사고의 가해자를 감싸는가 하면 은퇴 후 재단을 설립해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 그는 평소 주변인들에게도 배려심 많은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다.

장미란은 1983년 원주에서 1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3학년까지 피아노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하지만 유난히 큰 체격 탓에 또래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고 금방 의기소침해졌다. 이로 인해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이 떨어지자 역도인 출신인 아버지와 학교 체육선생님은 그에게 역도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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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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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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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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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승승장구 화면 캡쳐

장미란은 “처음엔 안 그래도 덩치 큰데 힘쓰는 운동을 시키려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며 “어린시절 피부도 안좋았고 덩치도 컸고 잘하는 것도 없어 열등감이 많은 아이였다”고 고백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마지못해 역도부에 들어갔지만 장미란은 한 남자선수의 말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가자마자 경량급 정도 되는 남자선수가 날보고 ‘우와 진짜 크다’고 하는거에요. 그 말에 상처받아서 부모님과 옥신각신했어요. 결국 그 해 겨울방학 때 다시 역도장을 가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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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승승장구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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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승승장구 화면 캡쳐

역도를 시작하고도 한동안은 친구들에게 자신 있게 말도 하지 못했다. 장미란은 “창피했다. 수업 끝나고 일찍 어디론가 가는 나를 보고 친구들이 궁금해 했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선생님한테까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장미란은 “바벨을 잡기가 죽기보다 싫었다”고 했다. 그러나 바벨을 잡은 지 10일 만에 떠 밀려 출전한 강원도 중학생 대회에서 덜컥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장미란은 대회 때 마다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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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화면 캡쳐

그는 천부적으로 힘이 좋았고 바벨을 드는 감각도 뛰어나 역도를 시작한지 4년 만인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역도 최중량급(75㎏이상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며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여성’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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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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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커뮤니티

장미란은 “그 때 역도를 배우지 않았으면 자신감도 꿈도 목표도 없이 살았을 것”이라며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뚜렷히 자랑할만한 게 없던 내가 역도를 만나면서 꿈과 목표, 자신감도 생기고 도전을 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장미란은 2005년, 2006년, 2007년, 2009년까지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했고 2012년에는 런던올림픽 75㎏급에서 4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2010년,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당초 이 교통사고는 큰 부상이 아니라고 알려졌으나, 사실 그는 2주 이상 입원해 있었으며 통원 치료도 오래했다.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은 이유는 “사고를 낸 (가해자)분께서 엄청나게 미안해하실 텐데, 이런 뉴스가 나가면 더욱 힘들어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그는 사고 후 허리 목 팔목 등 다발성 부상에 시달렸다. 2009년 세계선수권자가 된 뒤로 2010년부터 기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장미란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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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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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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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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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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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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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화면 캡쳐

이후 장미란은 코치와 관계자들이 뜯어말리는 가운데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다. 이때 출전을 강행한 이유는 ‘1위는 못하지만 그대로 출전해서 순위를 높이면 다른 선수들의 쿼터(출전권)를 지킬 수 있으니까’였다.

장미란은 결국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이 확정된 뒤 메트에 무릅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감격을 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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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졸이며 힘을 모아준 응원단에게 감사 인사를 한 장미란 선수의 아버지 장호철씨. (중국 인터넷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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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터넷 커뮤니티

2012년 2월, 장미란(30·고양시청)은 ‘장미란 재단’을 공식 출범시켰다. 장미란 재단을 통해 스포츠선수(헤드멘토)-재능기부자(서브 멘토)로 구성된 멘토그룹과 스포츠 꿈나무들의 만남의 장을 열겠다는 취지였다. 장미란은 “올림픽 비인기종목을 돕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재단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추다”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은퇴 기자회견장에 선 그녀는 중학교 3학년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중학교 3학년까지 꿈이 없었다. 그리고 꿈 없던 여학생은 역도를 통해 국민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됐다.” 그리고 자신처럼 미래를 고민하고 있을 청소년에게 메시지를 던졌다.

“덩치가 있고 외적으로 자신이 없는 친구들은 어디를 가도 위축된다. 나도 그랬기에 그 마음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나를 보면서 힘을 얻는다고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 요즘 청소년들이 미래에 대해 많이 고민을 하는데 누구든 잘 할 수 있는 것이 꼭 한가지씩 있다. 내가 역도를 통해 길을 찾았던 것 처럼 주변 소리에 귀기울이는게 좋을 것 같다.”

힘들었던 중학교 3학년생 시절을 떠 올리며 장미란은 재단 설립을 꿈꿨고 스타가 된 뒤 그 꿈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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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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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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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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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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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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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