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천루 속 삶의 현장…을지로 골목 유람기

중구청 ‘新을지유람’ 따라 방산시장, 베이킹거리, 디퓨저상가, 노가리골목 탐방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을지로(乙支路)는 시청 옆 1가에서 동대문의 7가까지 이어지는 서울의 오래된 길이다.

길의 시작과 끝이 도심 업무지구와 패션단지로 휘황찬란하다면 중간쯤인 3∼5가는 오랜 기간 소상공인들의 터전이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한복판의 작고 오랜 점포들이 들어선 골목을 따라 걷는 ‘신(新) 을지유람’ 투어를 중구청이 내놓은 이유는 이곳에서 을지로의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차와 사람과 오토바이가 어지럽게 오가는 시장통과 1970년대 지어진 상가의 좁은 통로를 지나면 관우를 모신 사당이 나타난다. 철공소 골목 바로 옆에 도자기 피겨 가게가 있는가 하면 길의 끝에선 오아시스 같은 생맥줏집을 만나는 곳이 을지로다.

新을지유람 안내 표지 /촬영 김지헌

가게 연혁을 물으면 머리를 긁적이며 수십 년 전쯤이라고 말하는 베테랑 상인들, 복잡다단하게 들어선 물건들, 새로운 아이디어와 영감을 찾아 골목을 찾아 나선 젊은 디자이너가 모두 이곳 을지로에 있었다.

◇ 비닐, 종이, 관우 사당, 한국 최초 아파트…오래된 골목
봄비가 조금씩 내리던 지난 26일 오후 을지로4가역에서 출발해 을지로5가의 방산시장으로 향했다. ‘종합 포장 인쇄타운’을 표방하는 인쇄·포장 전문 시장이다.

거의 모든 형태의 비닐을 취급한다는 ‘세영 패키지’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에어캡이 든 주황색 택배 포장지부터 테이프, 보호필름, 키친랩 등이 눈에 띄었다.

사장 김용호(52)씨는 “택배 봉투만 해도 예전엔 얇은 비닐 소재였다면 이제는 에어캡 등으로 내용물을 보호한다”며 “지금은 포장을 안 하면 상품 가치가 없는 시대라서 포장도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원래 이 가게에 포장용 비닐을 납품하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장사를 배우려고 이곳에 취업한 이후 10여년 전 가게를 인수했다고 한다.

민방위 외투를 걸친 그는 “동네 통장이기도 해서 민원을 해결하고 오는 길”이라며 “20대 때 방산시장에 와서 일생을 이곳에 바쳤다”고 웃었다.

가게 앞을 지나던 독일인 관광객 사나즈 골파예간(36) 씨는 진열된 각종 상품을 촬영하면서 “여러 품목이 아니라 한 가지 품목의 다양한 상품을 늘어놓은 모습이 흥미롭다”고 신기해했다.

비닐가게 사장 김용호 씨 /촬영 김지헌

시장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종이류를 취급하는 지업사가 모인 곳이 나온다.

유재학(58) 씨는 이곳에서 40년 가까이 장사를 했다. 유씨는 “고향이 강원도 영월인데 19살에 고향 선배를 따라 올라왔다”며 “이후 군대 시절 빼고는 모든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떠올렸다.

아내와 둘이서 가게를 꾸리는 유씨는 색색 한지를 돌아보며 “요즘은 온라인 판매를 하는 가게도 많은데 저는 둘이서만 일하다 보니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버겁다”고 웃음 지었다.

유씨는 “흔히들 보는 축포를 쏠 때 날리는 종이 있잖나. 그 종이는 99% 방산시장 지업사들이 납품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며 “이렇게 시장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찾아오지, 혼자 뚝 떨어져 있으면 장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관우 사당 ‘성제묘’ 입구 /촬영 김지헌

방산시장을 빠져나와 인도에 붙은 ‘新을지유람’ 표지를 따라 걷다가 청계천에 이르기 직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와 구조물이 눈에 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저 지나칠 좁은 길목이다.

관우를 모신 성제묘(聖帝廟)다. 사당을 둘러싼 기와 벽이 이웃한 현대식 건물의 담과 간격 없이 붙어 있다. 일단 건물을 짓고 보던 개발시대의 흔적일 것이다.

중구청 이상준 도심산업1팀장은 “관우 숭배가 민간에 전파돼 이런 작은 묘가 생긴 것”이라며 “관우가 중국에서는 재물을 부르는 신으로 추앙받는다고 한다. 방산시장 상인들은 1년에 한 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설명했다.

성제묘는 서울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7호다. 이 팀장은 “관리상 문제가 있어서 상시 일반 개방은 어렵다”며 “을지유람 참가자에게만 공개한다”고 소개했다.

국내 최초 아파트 ‘중앙아파트’
/촬영 김지헌=연합뉴스 제공(이하 동일)

을지유람 도중 한국 최초의 아파트도 만날 수 있다. 주교동의 중앙아파트다. 자재 업체였던 중앙산업이 1956년 사택으로 지었다.

방, 부엌, 화장실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이를 모두 한 공간에 넣어 화제가 됐다고 한다. 원형을 유지한 측면의 노출된 철골 계단과 복도식 구조가 눈길을 끌었다.

◇ 을지로로 향하는 젊은이들…”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을지유람 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거리의 색깔과 향이 시시각각 바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방산종합시장 건물로 들어서면 확 밝아진 조명과 산뜻한 향이 감각을 사로잡는다. 디퓨저 가게 40여곳이 모여 있다.

이곳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정철수(53)씨는 이곳이 원래는 오일이나 천연비누를 파는 가게들이 모인 곳이었다고 떠올렸다.

정씨는 “향초 가게 두 곳이 처음 생긴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며 “향초는 직접 향을 맡아봐야 하니 오프라인 가게가 필요하지 않겠나. 이곳으로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향 관련 매장이 40곳 넘게 생겼다”고 말했다.

디퓨저 상가의 정철수 씨 /촬영 김지헌

향초·디퓨저 거리는 인적 구성도 시장 건물 바깥과 확연히 달랐다. 비닐이나 지업사 등에 중장년 남성들이 다수였다면 이곳은 젊은 연령대의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을지로 4·5가는 도심 공동화 현상이 심각한 곳이다. 낮에 직장인들로 붐비다가 밤이 되면 죽은 듯 조용해진다.

김소정(31) 도예작가는 어두운 도시를 밝히려는 ‘을지로 예술가 지원사업’을 활용해 을지로에 작업장 겸 전시장 ‘퍼블릭 쇼’를 차렸다.

김씨는 “한국에서 도자기로 유명한 이천에서 시작했는데 제작 여건은 좋았지만, 소통이나 전시의 기회가 한정적이었다”며 “을지로로 옮겨보니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을지로는 젊은 작가에게 새로운 영감도 줬다.

그는 “그릇만 만들 생각은 없던 차에 주변 조명가게 사장님들이 오셔서는 도자기로 조명을 만들 수 있는지 묻더라”며 “생각지 못했던 것을 만들게 됐고 그 덕분에 해외 전시도 나갈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도예작가 김소정(오른쪽) 씨와 동료 이토 유카 씨 /촬영 김지헌

방산시장에는 아예 주 고객이 젊은 층인 ‘초콜릿·베이킹 거리’도 있다. 제과 재료와 도구를 파는 가게들이 모인 곳이다.

중구청 이상준 팀장은 “밸런타인데이 즈음해서는 직접 초콜릿을 만들려는 여학생들로 굉장히 붐비는 곳인데 화이트데이 때 남학생들이 오지는 않더라”며 웃었다.

친구와 이 거리를 돌던 정서희(24) 씨는 “베이킹에 관심이 많아서 과자 재료를 사러 왔다”며 “다양한 재료가 있고 가격이 저렴한 데다가 구경할 거리도 많아서 종종 온다”고 말했다.

◇ 2시간 도보 끝에 만나는 ‘오아시스’ 노가리 골목
신 을지유람 코스는 꽤 길다. 2시간가량 걷기 때문에 운동화와 가벼운 차림은 필수다.

걸음에 지친 이들을 위한 종착점은 을지로 노가리호프 골목이다.

1980년 가장 먼저 문을 연 ‘오비베어’와 맞은편의 두 번째 가게 ‘뮌헨호프’ 등에서 노가리 굽는 냄새를 풍겨온다.

노가리골목상인회장인 뮌헨호프 사장 정규호(77) 씨는 원래 동대문에서 원단 장사를 했다.

을지로 노가리골목 /촬영 김지헌

정씨는 “다들 옷(정장)을 맞춰 입던 시절이라 벌이가 괜찮았는데 1975년께부터 기성복이 도입되면서 내 물건을 납품받던 사람들이 다 망했고 나도 망해버려서 이 장사를 시작했다”고 웃었다.

노가리는 많으면 하루에 400∼500마리 굽는다고 한다. 그만큼 이윤이 아닌 적자가 쌓인다. 이 골목 노가리 값은 한 마리 1천원인데 원가를 밑돈 지 오래다.

정씨는 “처음 시작할 때 노가리 200원, 맥주 한 잔 500원이었고 15년쯤 전부터 노가리 1천원을 받았다”며 “노가리골목을 관광 상품화하자고 상인회 회원들이 똘똘 뭉쳐서 노가리는 서비스 차원으로 내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골목 호프들의 수익은 대부분 맥주에서 나온다는 설명이다. 정씨는 “한 3년 전 중구청이 옥외영업 허가를 내줬다”며 “을지로가 죽어가다가 노가리골목만은 사람 소리가 나고 노가리 냄새를 풍기는,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골목이 됐다”고 말했다.

길 건너편 오비베어에서 맨손으로 노가리를 굽던 사장 강호신(59) 씨도 “노가리는 서비스 격”이라며 “특제 소스는 39년 전 아버지가 만드신 그대로 레시피를 쓴다. 그 레시피는 저와 아버지만 알고 제 남편이나 아들도 모른다”고 웃었다.

중구청의 을지유람은 공구, 조각, 타일·도기, 철공소 밀집 거리 일대를 배경으로 2016년 첫선을 보였다. 지금까지 301회 운영해 2천여 명이 다녀갔고 이제 새로운 버전의 코스가 추가됐다.

고층빌딩, 낡은 건물, 낙서, 전선이 뒤얽힌 을지로 골목 /촬영 김지헌

신 을지유람이나 기존 을지유람에 참가하려면 중구청 도심산업과(☎ 3396-5585∼6)나 구청 홈페이지에서 사전 신청하면 된다.

평일과 토요일 오후 3시에 운영하며 4명 이상이면 해설사를 배정한다. 참가비는 무료이며 희망하는 날로부터 최소 이틀 전에 신청하는 것이 좋다.